상담실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제일 처음 맞닥드린 것은 여유로운 척, 거만한 태도로 앉아있던 A선생님의 모습이었다.
통상 상담할 때는 부모를 위한 커피와 물이 준비가 된다. 4년 넘게 이 유치원을 다니면서 그래왔다. 그런데 그 날은 물병만 덩그라니 올려져 있었고, A선생님 본인만 이제 막 뽑은 라떼 한잔을 준비해두었다. 이렇게 책상을 셋팅한 것도, 본인만 커피를 준비한 것도 우리보다 우위에 서려는 나르시시스트의 단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정말x10 유치하지만, A선생님은 그런 사람인 것이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다리를 꼬고 그녀 못지 않게 몸을 뒤로 살짝 제쳐앉았다. 그리고는 편안한 곳인냥 여유롭게 물을 따랐고 이야기 할 때는 물잔을 돌리면서 애써 여유로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와이프도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
상담의 시작은 A선생님 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역시나 내가 보낸 이메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로서는 그녀의 의도가 드러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잠깐 ! 생각해보자. 우리 4명이 여기에 모인 건 "신아를 위해서" 모인 것 아닌가. 그녀는 내가 보낸 메일 중 아래 문구에 빡쳐있었고, 실제로 그 내용을 읽고 매우 매우 매우 화가났다고 말하며 나의 이메일을 문서로 출력까지 해서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와이프와 나는 내가 메일에 적은 oberflächlich(표면적인)가 그녀를 발작하게 했을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얼굴 빨개지며 따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 예상은 적중했다는 걸 알수 있었다. A선생님은 이 상담에 목적이 신아를 위한 것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우리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신경썼고,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피해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이 내용에서 나는 A선생님을 비난하지 않았고, 두 선생님이 함께 참여하면 좋겠다는 뜻과 함께 얻게 되는 장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A선생님은 자신이 표면적(oberflächlich)으로만 신아를 관찰한 것이라며 혼자 해석하고, 혼자 발작버튼이 눌린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선생이 우리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계속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평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운영을 담당하는 L선생님 앞에서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A선생님이 정말 신아를 생각했었다면, 우리의 요청대로 신아와 평소에 가까이 지냈던 C와 D선생님의 이야기도 함께 들어보자고 제안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전에 우리는 C선생님과도 상담을 한적도 있으니 이상할 게 없다. 그냥 원래 하던대로 하면 됐던 것이다. 심지어 첫 상담을 마치고 C선생님도 와이프에게 "신아는 잘지내고 있고,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라고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다시 상담 당시로 돌아가보자. 얼굴 뻘개지며 씩씩대고 있는 그녀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메일의 포커스는 신아와 더 가까이 관계맺고 있는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말을 잘안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그런건지, 또 어떤 상황에서 말을 내뱉는지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맞지 않느냐? 우리는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 앞의 oberflächlich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이 말을 듣고있던 L선생님이 말했다.
"Herr Choi는 그럼 여전히 우리를 신뢰하시는거죠?"
"당연하죠. 우리는 전적으로 유치원을 신뢰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첫째 신우도 그렇고 둘째 신아도 그렇고 유치원에서 너무 잘 지내고 있잖아요."
"(얼굴표정이 밝아지며) 여러번 신뢰하신다고 말해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 건 A선생님이지, 유치원이 아니다. 유치원은 정말 많은 노력을 하고 있고, 우리도 그 수고를 너무 잘 알고있다. 그 이후부터는 우리도, L선생님도 불편한 감정없이 원래처럼 편하게 대화를 했다. A 선생님 한명만 빼고 말이다.
편안한 대화의 흐름을 끊은 것은 A선생님이었다. 대화의 주제와 상관없이 그녀는 자신의 경력을 주절주절 읊기 시작했다. 아마도 낮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자기방어였을 것이다.
"저는 20여년 간 블라블라 이 분야에서 일을하고 있고, 매우 전문적인 인력이고 어쩌고 저쩌고, 교육도 꾸준히 듣고 있고 블라블라..."
"그리고 다른 선생님을 부르지 않겠다고 한 건... 블라블라... 경험이 적기도 하고, 일한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블라블라"
염병하고 있네. 재밌게도 분위기는 지난 상담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젠 이 여자가 변명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번 상담 시간을 통틀어 가장 긴 시간을 자기소개(?)에 할애했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방어적인 설명에 우리는 별로 주의를 귀울이지 않았다. 이미 L선생님과 우리는 유치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L선생님 앞에서 남들에게 신뢰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그걸 스스로 참지 못해서였던걸까?
A선생님의 긴 자기소개(?)가 끝난 후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분위기가 그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는지를 인지했는지, 이제 그녀는 우리가 대화할 때마다 독일어 단어뜻의 미묘한 차이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아에 대한 다른 선생님들의 생각도 듣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Meinung(생각)이라는 단어를 썼다. 99.8%의 확률로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Meinung(생각)이 아니라 Gedanke(생각)이라는 단어가 더 맞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에서 만약 우리가 "아! 그럼 Gedanke로 써야하는거야?" 라고 물어보는 순간, 대화의 화제가 신아에서 뜬금없이 독일어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불리할 때 논점을 흐리는 화제돌리기. 이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또 다른 특징이다. 정말 신기하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녀가 나르시시스트라는 확신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게 Meinung이든 Gedanke든 상관없다. 그리고 지금 상담의 목적은 신아에 대한 것이다"라며 이 상담의 목적을 분명히했다.
거만하게 몸을 뒤로 제껴있던 그녀의 태도는 조금씩 움츠러들었고, 손가락을 흔들거나 뜯기 시작했다. 말수도 급격하게 줄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여유롭게 나는 물잔을 돌리며 이야기했고, 와이프도 A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으며 대화했다. 상담은 지난 번 보다 더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
걱정이 많았던 와이프도 많은 부분 짐을 덜어놓았고, 나는 아주 많이 통쾌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당한 걸 마음 속에 담아뒀다가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를 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이프에게 이에 대해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 복수가 올 지 모른다고...
그 복수가 당장 다음 날 바로 나타날 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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